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92)> 효종 현종 3 - 북벌의 실체(2)

효종 현종 3 - 북벌의 실체(2)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된 결정적 근거는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내용입니다. 송시열이 쓴 ‘악대설화’라는 책에는,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하며 다음과 같이 북벌의 의지와 전략을 깊이있게 상의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오랑캐를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나 송시열이 위와 같은 독대 내용을 공개한 때는 효종 사후 16년이 흐른 숙종 1년 때이고, 송시열은 이즈음 예송논쟁을 잘 못 이끈 죄로 유배되어, 죽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처지..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1)> 효종 현종 2 - 북벌의 실체(1)

효종 현종 2 - 북벌의 실체(1) 전회에서 본 것처럼 효종하면 북벌, 북벌하면 효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북벌을 계획했고, 재야 산림의 거두이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불러들여 이들과 합작해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중원을 정복한 청나라의 힘과 기세가 하늘을 찔러 조선이 청나라를 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말이 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효종은 격변의 시대에 8년간 이역 땅에서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는 장면을 직접 보는 등 온갖 경험을 했고, 귀국해서는 형과 형수 그리고 조카의 죽음 등 정치의 비정함까지 두루 지켜 본데다, 세자에 책봉된 이후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을 우려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며 살아온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효종이 즉위하자..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90)> 효종 현종 1 - 효종 즉위

효종 현종 1 - 효종 즉위 소현세자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궁중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의 궁녀들 몇을 지목하여 죽였고, 강빈의 오라비들을 유배 보냈다가 불러 곤장을 쳐 죽였으며, 급기야 강빈을 폐서인하여 사사시켰습니다. 또한,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로 유배보냈고, 첫째와 둘째 아들은 현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잔혹한 아비이자 시아비이자 할애비입니다. 소현세자! 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겠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서양의 과학 문물을 보급하고 장려하여 조선을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꾸었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아주 어쩌면 일본보다 200년 앞서 개화를 하고 중흥을 해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89)> 인조 7 - 비운의 소현세자(2)

인조 7 - 비운의 소현세자(2) 이즈음 심양에서는 청태종이 병으로 죽고 그의 동생 도르곤이 청 태종의 여섯 살 난 아들을 황제로 세운 후 전군을 총 동원해 명나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한편, 이때 명나라에서는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이자성이 급격히 세력을 키워 북경을 접수했습니다(명나라 승정제의 자살과 함께 명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음). 그러나 청나라의 도르곤은 압도적 전력으로 어렵지 않게 북경을 함락하고 명실공히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북경을 점령한 청나라는 변발을 강요하는 등 한족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유연하고 절도 있는 조치로 인심을 얻고, 드디어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소현세자와 동갑인 도르곤은 소현세자에게 “이제 중원이 하나로 명확하게 통일되었으니 양국이 서로 못믿을..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88)> 인조 6 - 비운의 소현세자(1)

인조 6 - 비운의 소현세자(1)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34세의 나이에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습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진행입니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병자호란 후 1637년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인질로 잡혀온 항복한 나라의 세자, 어찌 보면 참 우스운 처지입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고요한 가운데 언제나 당당했으며, 항상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기를 쉬지 않았고, 조선 백성에 대한 애틋..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87)> 인조 5 - 병자호란(3)

인조 5 - 병자호란(3) 나라를 완전히 멸해버리겠다는 최후통첩에, 조선 조정은 1월 27일 청 태종에게 마지막 국서를 보냈습니다. -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께서는 뜻을 분명히 밝히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선의 국서를 받은 청 태종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해 자자손손 신의를 어기지 않는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 청과 조선은 군신의 예로 대하고 조선은 명과 단교한다. - 장자 등을 인질로 삼는다.(등등등등등등...) 삼전도에 항복식을 거행할 단을 쌓은 청은 몸을 결박하고 관을 끌고 나오는 만주식 예를 면제해주겠다는 큰 인심(!)..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86)> 인조 4 - 병자호란(2)

인조 4 - 병자호란(2) 청군의 급속 남진으로 인해 강화로 가지 못한 인조 일행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곧 청군이 쫒아와 눈보라 치는 남한산성을 에워쌌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은 죽기로 싸워야 한다는 의견과 화친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맞선 가운데 청군과 굴욕적인 물밑 교섭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청나라 진영을 찾은 조선측 대표 박난영의 목이 잘리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갈팡질팡 하던 중 청나라 태종이 직접 남한산성까지 내려오게 되니, 조선 조정은 작은 계책으로는 위기를 벗어날 수는 없는 중대한 국면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바뀐 1637년 1월 1일, 이 와중에도 조선 조정은 모두 꿇어 앉아 중..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85)> 인조 3 - 병자호란(1)

인조 3 - 병자호란(1) 정묘년의 치욕을 당한지 얼마되지 않아, 인조는 자기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승하여 명국의 승인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는지 후금에 대한 복수와 배척의 뜻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이 진정으로 정묘년의 치욕을 갚고자 한다면, 왕실이나 종친, 훈신들 나아가 양반들이 가진 갖가지 특전을 버리고 재정을 확충한 다음 민심을 수습하고, 무기를 장만하는 한편 군대를 모아 훈련을 시키는 등 야무진 각오와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조와 중신들은 “소중화”라는 관념과 대의에만 빠져 숨가쁘게 돌아가는 주변 정세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물론이요 실질적인 준비도 전혀 없이 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84)> 인조 2 - 정묘호란

인조 2 - 정묘호란 이즈음 후금에선 중대한 정세 변화가 있었으니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가 1626년 숨을 거두고 평소 조선정벌을 주장하던 8남 홍타이지가 새 칸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칸에 오르자마자 모문룡의 일 등을 명분삼아 사촌인 아민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627년 1월(인조 5년) 3만의 군사로 조선을 정벌토록 하였습니다. 후금의 막강한 전력 앞에 조선의 방어선이 속속 무너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란이 끝난 지 30여년 만에 이번엔 여진족에 의해 또 다시 조정이 피난을 가는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입니다. 후금 총사령관 아민은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의 완전 항복을 받아내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한양으로 내려오면서 조선과 협상을 시도하였..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83)> 인조 1- 인조 등극과 치욕의 예후

인조 1 - 인조 등극과 치욕의 예후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태종이나 세조와 같은 반정의 완전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중종과 같이 반정 세력에 의해 왕위에 앉혀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름대로 주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할 여건은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인조는 반정이 서인 정권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았고, 붕당의 폐해 역시 잘 알았기에, “당이란 말은 주자의 말이라 해도 듣고 싶지 않소”라고 하며 붕당의 활개를 허용하지 않았고, 특정인에게 권력이 쏠리는 것도 늘 경계했습니다. 또한 반정의 첫 번째 명분인 사대의 예를 지키기 위해 친명배금정책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하게 휘몰아치는 대륙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약소국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약한 자의 눈치 보기에 불과하였으니..

조선왕조실록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