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112)> 경종 영조 9 - 사도세자(2)

경종 영조 9 - 사도세자(2) 어린 시절 사도세자의 영민함을 나타내는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세자가 천자문을 읽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보고는 입고 있던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구슬 꾸미개로 장식한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사치한 것”이라고 하고는 즉시 벗어버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 시절의 영특함은 부왕과 왕실의 기대를 넉넉히 충족시킬 만했습니다. 세자는 8세 때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입니다.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 전까지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가,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에 발탁된 뒤 영의정에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 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습니다. 세자는 홍씨와 사이에 둘째 아들을 낳으니(첫아들은 2년 만에 세상..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11)> 경종 영조 8 - 사도세자(1)

경종 영조 8 - 사도세자(1) 영조 시대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은 영조가 하나뿐인 아들을 뒤주에 8일 동안이나 가둬 죽게 한 일일 것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밉기로서니 아비가 아들을 그렇게 죽인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영조가 사도 세자를 죽인 이유가 무엇일까에 관해 온갖 설이 분분합니다. 당쟁의 희생양이라거나 사도세자가 더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쳐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거나 하는 등의 설입니다. 어쨌든... 실록 등 여러 기록을 따라가면서 도대체 왜 영조는 하나 뿐인 아들을 그토록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을까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李愃)입니다.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10)> 경종 영조 7 - 영조의 콤플렉스

경종 영조 7 - 영조의 콤플렉스 노론의 도움으로 왕좌를 차지했지만 붕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던 영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붕당의 갈등을 완화, 해소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탕평책입니다. 영조는 즉위 초기에는 자신의 후원세력인 노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없는 관계로 경종 시대에 일어난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들을 등용하고 옥사를 일으킨 소론들을 정계에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들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자신의 확고한 뜻을 보이기 위해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영조의 이러한 노력으로 중앙정계에는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가 고르게 등용되어 ..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09)> 경종 영조 6 -영조 등극

경종 영조 6 -영조 등극 소론은 옥사의 확대를 연일 청했습니다. -궁인 김씨가 누구인지 밝혀내어 독살음모를 파헤치소서 (궁인 김씨는 경종 살해 음모 중 두번째 방법인 독살과 관련된 사람) 그러나 경종은 한결같이 옥사의 확대를 거부하였습니다. -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너무 많아 찾아낼 수 없다. 경종은 옥사의 확대가 가져올 후폭풍을 걱정했던 것 입니다. 소론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상궁 나인들에 대한 혹독한 조사가 이어질 것이고, 결국 실체가 있던 없던 소론이 원하는 답이 나올 것이며, 종국적으로 세제 연잉군이 위험하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경종인들 어찌 연잉군에 대한 감정이 없었겠습니까마는, 그는 사적인 감정을 누르고 대계를 택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우애일지도 모릅니다. - 미우나..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08)> 경종 영조 5 - 경종의 대반격

경종 영조 5 - 경종의 대반격 김일경의 상소를 접한 경종은 “진언한 것을 가납한다”라고 한 후, 그 즉시 승지들과 삼사들을 모조리 삭출할 것과 훈련 대장, 영의정, 좌의정을 모두 해임하고, 경종을 옹호한 조태구, 최규서, 최석항을 삼정승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순식간에 숙종식 환국이 재현된 것입니다.(신축옥사) 비록 심신이 허약하고, 드센 노론 세력에 위축된 경종이었지만 그도 왕은 왕이었던 것입니다. 경종은 노론의 거듭된 압박을 견디고 대리청정 과정에서 함정을 파 노론을 유인해 함정에 빠뜨렸고, 그러고도 바로 환국에 나서지 않은 채 김일경의 상소를 기다려 한방에 노론의 주요인사를 유배보낸 후 자신을 지원하는 소론으로 조정을 채우는 환국을 단행한 것입니다. 임금 자리를 빼고는 다 가졌다던 노론은 이..

조선왕조실록 2021.05.08

<조선왕조실록(107)> 경종 영조 4 - 노론, 함정에 빠지다!

경종 영조 4 - 노론, 함정에 빠지다! 전회에서 본 것과 같이, 경종은 대리청정을 한다고 했다가 안 한다고 했다가, 최종적으로 다시 세제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처음에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의 입장에서도 경종의 대리청정을 반대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죽음이 있을 뿐 대리청정의 명을 따를 수 없사옵니다. 백관과 연잉군이 사흘 동안 대리청정의 명을 거둘 것을 청했으나 경종의 뜻은 확고부동해 보였습니다. - 경들의 정성은 내가 이미 아오. 내 병세가 나라 일을 모두 감당할 수 없으니 비망기대로 거행토록 하오. 노론대신들이 모였습니다. -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오. 전하의 뜻이 저렇듯 확고하시니 이제 그만 정청을 그만 두고 전하의 뜻을 따릅시..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106) 경종 영조 3 - 경종의 함정

조선왕조실록(106) 경종 영조 3 - 경종의 함정 노론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세제로 삼도록 한 것은 엄연한 무리수였습니다. 소론이 이 문제를 들고 나섰습니다. 소론 유봉휘는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습니다. 비록 그 성명을 다시 논의할 수 없을지라도 신하가 임금을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긴장한 노론은 즉각 유봉휘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습니다. 명이 내려져 온 나라가 기뻐하는데 유봉휘는 무슨 심장으로 국본을 흔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국문하여 저의를 밝히소서 논란 끝에 유봉휘는 유배를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조정이 온통 노론세력임은 다시 한 번 확인되었습니다. 세제를 세우는 일에 성공한 노론은 자신감을 얻은 김에 다음 단계의 일을 추진하였습니다. 세제 책봉이 있은 지 보..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105)경종 영조 2 - 노론의 무리수

조선왕조실록(105)경종 영조 2 - 노론의 무리수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노론 세력은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경종을 압박했습니다. 사실 노론 세력은 경종의 생모 장희빈을 제거한데 대한 보복을 우려해 경종의 즉위를 막아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바도 있었습니다. 노론 세력은 소론 세력이 경종을 충동질하여 보복을 하거나, 경종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 엉뚱한 종친을 양자로 삼아 세자에 책봉해 버리거나 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노론 세력이 밀고 있는 연잉군은 비록 세력이 큰 노론의 지원이 있었지만,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천인인 무수리 출신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습니다. 노론 세력은 경종의 심신이 매우 허약한 것을 노려 경종 1년에 계획한 바를 밀어붙였습니다. 이정소가 다음과..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104) 경종 영조 1-유약한 왕 경종 즉위

조선왕조실록(104) 경종 영조 1 - 유약한 왕 경종 즉위 46년에 걸친 긴 치세 동안 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통해 효종, 현종 때와 다른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켰습니다. 숙종이 반정의 위기 없이 여러 차례 환국정치를 펼칠 수있었던 데에는 사대부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었습니다. 사대부들은 상대 당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혀 숙종의 환국 정치에 편승했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상대 당을 제거하기에 바빴으며, 또 다른 환국을 우려해 임금에 대한 비판과 견제 포기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숙종의 정치는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이라 하겠습니다. 숙종은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하였고(전성기 때의 광해도 하지 못한 일),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유통시키는 등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치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널..

조선왕조실록 2021.05.04

<조선왕조실록(103)> 숙종 9 - 장희빈(6)

숙종 9 - 장희빈(6) 기사환국으로 남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장희빈으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졌듯이, 갑술환국으로 서인으로의 권력 교체와 인현왕후로의 중전 교체가 이루어지는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숙종은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이 단칼에 권력 교체를 해버린 후 곧 “예로부터 임금은 참작하고 선처하여 용서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 이제 은혜가 아주 없을 수 없으니 폐비를 별궁으로 옮겨 수직하고 늠료(봉급)도 주도록 하라” 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별궁으로 옮기는 날 직접 편지를 썼습니다. -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이제 별궁으로 옮기면 어찌 다시 만날 일이 없겠는가 이에 인현왕후는 다음과 같이 답장하며 숙종이 보내 온 의대를 사양하셨습니다. - 천만..

조선왕조실록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