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70 - 명종 3

고려왕조실록 70 - 명종 3 * 승려들의 저항 명종시대에는 크고 작은 전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시작을 알 린 것이 귀법사 승려들이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불교는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려사회 전체가 불교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신 정권에 의해 자신들의 기반이 무너져 내리자 불교 특히 교종 세력은 문신 귀족들과 결탁하여 무신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1172년 귀법사의 승려 백여 명이 실력행사에 들어가는데, 이들은 도성 북문으로 침입하여 선유승록 언선을 살해해 버립니다. 이에 이의방이 군사 천여 명을 데리고 나가 승려 수십 명을 죽여 버리자 겁에 질린 승려들..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69 - 명종2

고려왕조실록 69 - 명종2 * 삼두정치, 이고의 죽음 정중부, 이의방, 이고 세 사람은 스스로 신하의 최대 명예인 벽상공신에 오르고, 장군직과 문관 고위직을 겸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니 글자 그대로 “무인천하”가 열린 것입니다.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보통 병졸이었다가 군공으로 차차 승진해 대장군(상장군이었다고도 함)까지 되어 있던 정중부는 이때 65세. 이의방, 이고보다는 상당히 연장자였던 것 같으며,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에 비해 신중하고 온건한 편이었습니다. 수박희 현장에서 곧바로 일을 벌이려던 이고를 말린 것도, “문신이란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자.”라는 주장을 억제한 것도 정중부였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정변을 ‘정중부의 난’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의방과 이고가..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68 명종 1

고려왕조실록 68 명종 1 - 무신정권이 세운 임금. 명종(明宗)의 이름은 왕호(王晧), 자는 지단(之旦), 원래 이름은 왕흔(王昕)입니다.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선왕 의종(毅宗)의 친동생으로 1131년 인종9년 10월 경진일에 태어났습니다. 의종 2년에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었으며, 1170년 9월 기묘일 거사가 성공했음을 확신한 정중부가 의종을 폐위시키고 나서, 군사들을 이끌고 의종의 동생 왕흔을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말이 요청이지 실은 통보나 다름없는--- )합니다. 당시 왕흔은 40세로 세상사를 잘 판단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약간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무신들에 의해 선택되어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식을 갖게 됩니다. 명종은 즉위하자마자 곧 수문전(修文殿)에 나..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67 - 의종 6

고려왕조실록 67 - 의종 6 - 왕이 신하의 손에 죽다. 살아남은 문신들은 숨을 죽이고 숨을 곳을 찾기에 급급하였으나 그래도 임금을 모시던 궁내 환관 몇명이 무신들의 반란에 대한 저항을 해보았으나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맙니다. 내시와 환관 10여명이 정중부 일당을 치려고 모의를 꾸미다가 잡혀 죽는 작은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정중부는 의종을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유배 보내고 의종의 동생을 새 임금(명종)으로 추대하니 무신들의 잔인한 쿠데타는 완벽하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자겸이나 묘청의 반란 때보다도 더 무지막지한 살육이 자행되었으며, 특히 서로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문신들은 모두 찾아내 일방적으로 죽여 버렸는데, 죽은 벼슬아치의 수로 따지면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66 - 의종 5

고려왕조실록 66 - 의종 5 * 마침내 터져버린 무신의 불만 기본적으로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무신의 처지에 불만이 가득한 무신들로서는 다른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러웠겠지요. 당시의 정치에 대한 백성의 불만이 커질대로 커져있는 점도 유리하다 여겨졌습니다. 여기에 의종 21년(1167년)에 일어난 ‘화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왕의 행차 도중 좌승선 김돈중의 말이 우연히 어느 무사의 말과 충돌했고 여러마리의 말들도 같이 흥분하여 날뛰게 되자 그 와중에 누군가의 화살통에서 날아간 화살 한 대가 왕의 가마 옆에 떨어진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왕은 이를 암살 미수 사건으로 알고 충격에 빠졌고, 후환이 두려운 김돈중은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화살을 날린 자를 찾느라 한동안 벌집 쑤시듯 했는데, ..

고려왕조실록 2021.08.04

고려왕조실록 65 - 의종 4

고려왕조실록 65 - 의종 4 * 유흥에 빠진 임금. 의종은 친위 세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환관과 내시들을 측근으로 불러 정사를 팽개쳐든 채 유흥과 오락에 빠져 있다가, 간관들이 농성하면 요구를 들어 주는척하고, 다시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의종의 처세였습니다. 유교적 정치 이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였으며, 영의를 불러 점을 치게 하는 등 온갖 폐단을 초래한 임금 의종입니다. 도대체 의종은 왜 이러한 처신을 한 것일까요.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한 몫 거들기도 하였겠지만 이것이 의종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같습니다. 각종 미신을 조장하거나 놀이로 소일하며 문관들에게 자기 과시를 하는 것 외에는 미약한 권한을 가진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

고려왕조실록 2021.08.04

고려왕조실록 64 - 의종 3

고려왕조실록 64 - 의종 3 * 왕권회복을 위한 노력 부왕 인종이 그러하였듯이 의종 역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문벌 귀족으로부터 왕권을 되찾고자 무던히 애는 썼습니다. 기실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습명이었지만, 의종의 눈에 비친 그는 문벌 귀족의 앞자리에서 서서 자신의 왕권행사를 방해하는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왕 인종의 유훈에 따라 정습명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어찌되었던지 간에 의종으로서는 정습명을 비롯한 문벌 귀족들을 멀리하면서 자신의 친위세력을 키워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종이 선택한 문벌 귀족의 퇴치와 왕권회복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친위세력이 미약하다보니 의종이 시도한 방법은 환관과 내시를 중심으로 친위세력 그리고 일부 무..

고려왕조실록 2021.08.03

고려왕조실록 63 - 의종 2

고려왕조실록 63 - 의종 2 * 방탕한 왕 왕권회복을 위한 노력 그러나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여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148년에 현릉(顯陵: 태조의 능), 창릉(昌陵: 세조의 능) 등을 참배했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중창하고, ​1158년에는 백주(白州: 현재 황해도 연백지역)에 별궁(別宮)을 창건해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한 것에서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의종은 평소에 인정(人情)과 태평(太平) 등에 관한 생각과 글을 많이 남겼는데, 당시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왕조의 중흥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 정치면에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지는 못했고, 오히..

고려왕조실록 2021.08.03

고려왕조실록 62 - 의종 1

고려왕조실록 62 - 의종 1 * 우여곡절 끝에 오른 옥좌. 1446년 인종이 숨을 거두자 20세의 의종(毅宗)이 왕위를 이어 받게 됩니다. 인종과 어머니 공예태후 임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명은 철(徹), 이름은 현(晛), 자는 일승(日升)으로 1143년(인종12) 태자(太子)가 되었습니다. 부왕 인종은 의종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못내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임금이 될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공예왕후 또한 평소 이러한 점을 느끼고 있었던지 맏아들 현 대신에 둘째아들 대령군 왕경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태자도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 동생 왕경을 이유 없이 미워하며 반목을 일..

고려왕조실록 2021.08.02

고려왕조실록 61 - 인종 5

고려왕조실록 61 - 인종 5 * 인종의 치적.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후, 서경의 분사제도를 없애는 등 서경세력과 민에 대한 탄압이 행해지고, 개경의 문신세력을 견제하는 서경세력은 완전히 제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문벌귀족은 더욱 득세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이들이 지배하던 문벌귀족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게 됩니다. 묘청의 난은 개경의 문벌귀족과 서경출신 신진관료의 대립이라는 지배층 내부의 정권싸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문벌귀족정치에 대한 불만, 그리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에 반대하는 민중의 호응으로 거의 1년에 걸친 항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항쟁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이 반란은 12세기 농..

고려왕조실록 2021.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