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89 - 고종 4

고려왕조실록 89 - 고종 4 - 1차 몽고와의 전쟁 1231년 몽고의 칸 오고타이는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에 대해 힐책하는 내용과 함께 고려에게 항복하라는 국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동안 열심히 전쟁을 대비해온 고려가 항복을 거절하자 그해 8월 몽고군의 원수 살리타(살리타이, 살례탑)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니 드디어 고려와 몽고의 28년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의주를 함락시키고, 이때 투항한 고려의 장수 홍복원과 그의 군사들과 함께 귀주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귀주성을 지키고 있던 고려의 장수 박서와 김경손을 비롯한 고려군이 거세게 저항하자, 살리타는 귀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포차와 누차 등 무수한 대형 병기를 이용하는 등 맹공을 가하였..

고려왕조실록 2021.08.17

고려왕조실록 88 - 고종 3

고려왕조실록 88 - 고종 3 - 피할 수없는 몽고와의 전쟁 1219년 9월 임자일에 최충헌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이어받게 됩니다. 고종으로부터 왕씨 성까지 받을 정도로 부귀영화와 권력을 마음껏 주무르던 최충헌도 흐르는 세월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난 그의 나이 71세였습니다. 권력을 물려받은 최우는 교정별감이 되자마자 자신이 축적하고 있던 금은보화를 고종에게 바치고, 부친 최충헌이 빼앗은 토지와 금품들을 원래의 임자들에게 돌려주는 선심을 배풀고, 권력이 없거나 가난한 선비들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등용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규보와 최자입니다. 1221년 8월 기미일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일행을 이끌고 고려에 왔는데 이들은 일행 21명이 모두 대전에..

고려왕조실록 2021.08.15

고려왕조실록 87 - 고종 2

고려왕조실록 87 - 고종 2 - 전운이 감도는 정국 고려에서 반응이 없자 1216년 8월 을축일에 거란의 장수 아아걸노가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합니다. 거란병이 영덕성을 무너뜨리면서 계속 남하해 내려오자 고려 조정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이를 막아내려 하지만 거센 물결과도 같이 밀려오는 거란군의 기세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게다가 거란군은 유족들이라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왔으며 이들은 산과 들을 누비고 다니면서 알곡을 거두고 소와 말을 마음대로 잡아먹는 등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가 되곤 하였습니다. 병력을 보충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은 처음에는 승리를 하는 듯 하였으나 수만 명의 거란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거란군은 야밤을 이용하여 청천강을 건너 서경으로 몰려왔습니..

고려왕조실록 2021.08.15

고려왕조실록 86 - 고종 1

고려왕조실록 86 - 고종 1 - 고종의 등극 고종은 강종 1년(1212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습니다. 이름은 철(瞮), 자는 대명(大明) 또는 천우(天祐)로 강종과 원덕태후 유씨의 맏아들로 1192년 정월에 태어났습니다. 고종은 1197년 할아버지 명종이 유배될 때 아버지 강종과 마찬가지로 8세의 나이로 유배의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가 유배된 곳은 안악현(황해도)이었는데 그곳에서 강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212년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린나이에 아버지도 없이 14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유배생활로 견뎌온 고종으로서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기쁨은 더더욱 컸겠지요. 어쩌면 얼떨떨..

고려왕조실록 2021.08.15

고려왕조실록 85 - 강종

고려왕조실록 85 - 강종 - 늙은 왕의 등극. 희종이 왕권회복을 위하여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면서, 명종의 맏아들 오(祦)는 또 한 차례 급하게 밀려오는 운명의 파고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는 대수(大菙), 이름은 숙(璹)·정(貞)·오(祦). 시호는 원효(元孝)로 1152년에 태어나 1173년 4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명종의 장남인 오는 처음부터 왕이 되어야 할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1197년 9월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강제로 폐위되면서, 오도 같이 강화도에 유배되고 맙니다. 그 후 줄곧 강화에서 지내다가 1210년 12월에 개경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나긴 유배 생활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다음해인 1211년 정월에 한남공에 봉해졌다가 그해 12월에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그를 옹립함에 따라 ..

고려왕조실록 2021.08.15

고려왕조실록 84 - 희종 2

고려왕조실록 84 - 희종 2 - 최충헌의 암살기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후, 정중부에서 최충헌에 이른 60년간 무인들이 폐립한 왕은 모두 6명이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최충헌이 갈아 치운 왕이 4명이나 됐던 것입니다. 그는 왕이 될 욕심까지는 갖지 않았지만, 왕을 갈아치우는 데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무신정권이 들어서서 고려의 정국을 농단한 지 39년째로 접어드는 해였습니다. 희종은 명종·신종과는 달리 적통자로서 별다른 문제없이 왕위에 오른 군주로서 정통성과 대의명분이 뚜렷했고, 이와 같은 배경은 왕권을 회복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반이었습니다. 게다가 희종 또한 최충헌의 독단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은 희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고..

고려왕조실록 2021.08.13

고려왕조실록 83 - 희종 1

고려왕조실록 83 - 희종 1 - 왕가의 전통은 잇게 되었으나... 부왕 신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희종은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이래 사라졌던 왕가의 전통을 이은 임금이 되었습니다. 의종은 왕권의 복구를 시도하다 이의민에게 살해되었고, 정중부가 멋대로 즉위시킨 명종은 최충헌이 폐위시키고 나서 내세운 왕이 신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명종과 신종은 왕가의 전통이 아닌 무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임금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종은 그 시작이 다릅니다. 죽음을 앞둔 신종은 비록 실권 없는 허수아비 임금일지언정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기에, 살아생전에 선위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죽고 나면 다음 왕의 자리는 오로지 최충헌의 말 한마디에 달린 일인지라 자신의 아들인 희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거듭거듭..

고려왕조실록 2021.08.13

고려왕조실록 82 - 신종 5

고려왕조실록 82 - 신종 5 - 최충헌과 신종의 죽음.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은 고려의 역사, 그 가운데서도 무신의 정권 독점기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장장 60년의 최씨 정권 기틀을 세운 최충헌은 문신적 자질을 갖춘 무인으로 또한 독재자로서의 기본 요건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17년간을 집권하면서 4명의 왕을 바꿔 치웠고, 동생을 비롯한 수많은 정적을 죽여가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임금 이상의 권력과 사치를 누렸지만, 직접 임금이 되려는 꿈은 꾸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권력을 탐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권력의 마지막 절제도 아는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성공한 쿠데타 무신란 이후, 100여 년간 지속한 무신정권 기간에 무려 60년간 지속한 최씨 정권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

고려왕조실록 2021.08.12

고려왕조실록 81 - 신종 4

고려왕조실록 81 - 신종 4 - 만적의 난 임금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신하로 국가의 대사를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결정 할 수 있게 된 최충헌은 자기 집에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임금에게 보고나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시행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사권을 틀어쥔 채 내키는 대로 대신들을 갈아 치우기도 하였습니다. 나라의 정치가 이러하다보니 불만을 품지 않은 자가 드물었고,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벼슬아치들은 정의라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자신의 이권에 따라 모든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등 한마디로 멋대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죽어나는 것은 오로지 백성들 뿐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 곳곳에서 난을 일으켰고 그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고려의 상황을 더욱 어려운 지경에 ..

고려왕조실록 2021.08.12

고려왕조실록 80 - 신종 3

고려왕조실록 80 - 신종 3 - 형제의 충돌 동생 충수가 다음날 새벽에 자신의 수하들을 치러 온다는 말이 최충헌에게 들어가자 최충헌은 수하인 박진재, 김약진, 노석숭을 불러 경위를 설명하니, 최충헌의 외종질인 박진재가 “공의 형제는 두 분 다 제 외삼촌이니 누구를 가까이 하고 누구를 멀리하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안위가 바로 이 일에 달렸으니, 동생을 도와서 역적이 되는 것보다는 형을 도와 순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하는 법이라고 했으니 저는 당연히 김약진, 노석숭 등과 함께 각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돕겠습니다.”하고 최충헌의 편에 서겠다고 하자 최충헌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자정 무렵에 최충헌이 군사 천 여 명을 거느리고 고달고개를 넘어 광화문(廣化門)까지 와서 왕..

고려왕조실록 2021.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