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 129

고려왕조실록 79 - 신종 2

고려왕조실록 79 - 신종 2 - 권력의 분점에는 항상 분쟁이 따르기 마련 욕심이 욕심을 부른다는 말이야 말로 동서고금에 두루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형과 함께 거사를 성공시켜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고, 왕으로부터 “수성제난공신(輸誠濟亂功臣)·삼한정광중대부(三韓正匡中大夫)·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위위경지도성사(衛尉卿知都省事)·주국(柱國)이라는 길고도 긴 벼슬의 주인이 된 최충수지만, 그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더 큰 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합니다. 애초 태자는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을 처로 맞아들였는데, 태자위에 오르자 최충수가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왕에게 강청을 하니 왕은 몹시 불쾌해 했습니다. 최충수가 부러 내인(內人)더러, “주상께서 이..

고려왕조실록 2021.08.11

고려왕조실록 78 - 신종 1

고려왕조실록 78 - 신종 1 - 신종(神宗)의 등극 명종에게는 무신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흥과 일신의 안일에 사로 잡혀서, 자신의 친형인 의종의 허리를 꺾어 참혹하게 죽인 이의민에게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고 그의 눈치나 보면서 살다가 결국은 또 다른 무력에 의해 비참한 생을 살다가 마감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명종을 쫓아낸 최충수 일당은 누구를 왕으로 내세울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서로 엇갈렸는데, 동생 최충수는 “사공(司空) 왕진(王縝)은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달하고 총명하며 도량이 있으니, 그를 왕으로 옹립한다면 국가의 중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사촌인 진(縝)을 왕을 시키자고 하였는데, 이는 최충수..

고려왕조실록 2021.08.10

고려왕조실록 77 - 명종 10

고려왕조실록 77 - 명종 10 - 봉사십조(封事十條)와 명종의 죽음. 명종으로부터 거사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최충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번 거사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보다 확고히 인식시키기 위해 “봉사십조" 를 명종에게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는 왕에게 정전(正殿: 조회를 하던 궁전. 즉 延慶宮을 말함)으로 환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1171년(명종 1)에 연경궁(延慶宮)이 불에 타자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겼는데, 연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복구가 불길하다는 설을 믿고 환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삼소궁(三蘇宮)을 경영하면서 국력만 소모하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이러한 요구는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제2조는 필요 이상의 관원, 즉 용관(冗官)을 도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무..

고려왕조실록 2021.08.10

고려왕조실록 76 - 명종 9

고려왕조실록 76 - 명종 9 - 최씨의 손아귀에 들어간 고려. 아무튼 이 비둘기 사건이 발단이 되어 최충수와 그의 형 최충헌이 이의민을 처단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고, 이의민은 미타산의 별장에 머물고 있던 중 최충헌 형제의 습격을 받아 1196년 4월에 비참하게 살해되고 맙니다. 기록에 의하면 최충수가 먼저 말을 타고 있는 그를 급습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는데 바로 최충헌이 칼을 휘두르면서 덤벼들어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 목을 베어 버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은 이의민 3대 일가를 부하들을 시켜 모조리 참살해 버립니다. 이것을 단순히 비둘기 한 마리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최씨들 역시 음서로 벼슬을 할 만큼 권위가 있는 가문이었는데, 이들의 재산을 이의민 일가..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75 - 명종 8

고려왕조실록 75 - 명종 8 - 이의민의 독주. 경대승의 죽음은 무신들에게 짓눌린 삶을 살아온 명종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임금을 살해한 자라하여 경대승이 위협을 가하곤 하였기에 막강한 이의민마저 개경을 떠나 경주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권력을 농단할 만한 무신들이 없는 틈에 왕권의 기틀을 다지고 이제라도 제대로 된 고려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종은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개경으로 불러올리는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으로, 그의 부친 이선(善)은 소금과 채를 파는 것이 직업이었고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천민 출신이었으나 경주를 뿌리로 하..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76 - 명종 9

고려왕조실록 76 - 명종 9 - 최씨의 손아귀에 들어간 고려. 아무튼 이 비둘기 사건이 발단이 되어 최충수와 그의 형 최충헌이 이의민을 처단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고, 이의민은 미타산의 별장에 머물고 있던 중 최충헌 형제의 습격을 받아 1196년 4월에 비참하게 살해되고 맙니다. 기록에 의하면 최충수가 먼저 말을 타고 있는 그를 급습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는데 바로 최충헌이 칼을 휘두르면서 덤벼들어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 목을 베어 버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은 이의민 3대 일가를 부하들을 시켜 모조리 참살해 버립니다. 이것을 단순히 비둘기 한 마리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최씨들 역시 음서로 벼슬을 할 만큼 권위가 있는 가문이었는데, 이들의 재산을 이의민 일가..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75 - 명종 8

고려왕조실록 75 - 명종 8 - 이의민의 독주. 경대승의 죽음은 무신들에게 짓눌린 삶을 살아온 명종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임금을 살해한 자라하여 경대승이 위협을 가하곤 하였기에막강한 이의민마저 개경을 떠, 나 경주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권력을 농단할 만한 무신들이 없는 틈에 왕권의 기틀을 다지고 이제라도 제대로 된 고려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종은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개경으로 불러올리는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으로, 그의 부친 이선(善)은 소금과 채를 파는 것이 직업이었고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천민 출신이었으나 경주를 뿌리로 ..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 74 - 명종 7

고려왕조실 74 - 명종 7 - 경대승의 집권. 앞에서도 설명한 바가 있듯이 강력한 권력의 그늘에는 불법과 무리한 권력의 남용등과 같은 독버섯이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정중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의 부당한 치부와 권력의 남용에 민심은 극도로 들끓었습니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정중부를 쓰러뜨리고 권력을 독차지하고자 야망을 불태우는 젊은 장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경대승(慶大升)입니다. 경대승은 청주(淸州 : 충북 청주시) 사람으로 부친 경진(慶珍)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습니다. 그는 나이 열다섯에 음서로 교위(校尉)에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됩니다. 부친 경진은 성질이 탐욕스럽고 비루해 남들의 땅을 많이 빼앗았는데, 그가 죽자 아들 경대승은 전안(田案 : 量案으로 토지대장)을 ..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73 - 명종 6

고려왕조실록 73 - 명종 6 * 망이, 망소이의 난. 그러나 신하가 정변을 일으켜 왕을 갈아치우고, 시해해버리고, 그들 사이에서도 암살이 거듭되는 권력 상층부의 혼란을 목격한 지방과 하층민들의 동요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의방을 없애고 나서도 2년이 더 가서야 조위총의 난이 평정되자, 이번에는 공주의 천민 망이, 망소이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1174년(명종 4)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 등 서북계 지방의 민란을 ‘서적(西賊)’이라 하고, 남부지방의 민란을 ‘남적(南賊)’이라 하는데, 망이·망소이의 난은 남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1176년(명종 6) 정월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해 공주를 함락시킵니다. 당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고려왕조실록 2021.08.09

고려왕조실록 71 - 명종 4

고려왕조실록 71 - 명종 4 * 조위총의 반란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이의방의 몰락을 알리는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서경유수 조위총이 1174년 일으킨 난이었습니다. 조위총은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 함경도)와 북계(北界: 평안도)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는 격문을 돌려 선동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절령(岊嶺, 또는 자비령으로 지금의 황해도 황주와 시흥 사이의 고개)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대해 개경(개성)의 조정에서는 평장사 윤인첨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서경(평양)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고려왕조실록 2021.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