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82)> 광해 6 - 광해의 몰락, 인조반정!

광해 6 - 광해의 몰락, 인조반정! 광해가 반정에 의해 끌려내려 간 배경과 원인은 무엇일까요 실록에 나타난 반정 당사자들의 명분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 첫째,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 둘째, 민가 수천을 철거하고 무리한 궁궐 증축을 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 셋째,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한 폐륜을 저질렀다. 그러나 중립외교에 관한 부분은 논란이 되기는 했으나 결국 크게 벌어진 결과물은 없다 할 것이고, 무리한 궁궐 증축이 있기는 했으나 이러한 정도의 공사는 다른 왕도 많이 추진했던 것이었으며, 또한 패륜으로 치면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가 더하면 더 했지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인조반정 주도자들의 명분은 그야말로 명분에 불과한 것이고, 반정..

조선왕조실록 2021.04.21

<조선왕조실록(81)> 광해 5 - 광해의 외교 마인드

광해 5 - 광해의 외교 마인드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가 만력황제의 방탕, 조선 파병으로 인한 국력손실 등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즈음, 명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만주의 대영웅 누르하치는 8기제 등 강력한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인근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한 후 1618년에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구원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천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할 땐 죽어도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광해는 누르하치의 기세가 오히려 명나라를 압도한다고 보고 명나라의 요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거의 모든 신..

조선왕조실록 2021.04.21

<조선왕조실록(80)> 광해 4 - 폭군 광해!

광해 4 - 폭군 광해! 광해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북은 광해를 대놓고 반대한 소북의 유영경을 탄핵했고, 유영경은 곧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광해의 형인 임해군의 역모 고변이 있었는데, 광해는 겉으로는 "내 형이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면서도 거론된 이들과 임해군을 모두 죽이니, 조정 신료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해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역모 고변임을 잘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사건을 부풀려 수많은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옥사를 수차례 벌렸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였습니다.(영화 “광해”에서 광해의 충신으로 나오는 허균 역시 석연치 않은 역모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광해가 벌인 여러 옥사 중 대표적인 것은 “계축옥사”입니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79)> 광해 3- 임금 광해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광해 3 - 임금 광해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선조 40년 10월, 선조는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누웠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오만 가지를 생각했으나 차마 두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으로 어찌해 볼 수는 없었고, 결국 비망기를 내려 장성한 광해에게 전위 또는 섭정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갑자기 선조가 몸져누워 위와 같은 뜻을 밝히자 급해진 것은 영창대군에 올인한 소북파의 유영경과 인목왕후였습니다. 인목왕후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으나 유영경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선조의 뜻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반면에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는 유영경이 세자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불충을 저질렀다며 유영경을 강하게 공격하였습니다. 대북과 소북이 건곤일척의 목숨..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78)> 광해 2 - 광해의 恨(2)

광해 2 - 광해의 恨(2) 왜란 통에 어쩔수 없이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 선조는 명나라에 세자책봉 승인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광해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 명나라 조정이 광해의 세자책봉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는 명나라 황제의 태자 책봉 문제와 맞물려 명나라 조정이 "장자로서 세자를 삼아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조는 명나라의 상황과 입장을 파악한 후 세자 책봉 승인을 위한 노력을 대폭 줄이는 한편, 나아가 광해를 사실상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기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광해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운 일이 또 하나 생겼으니, 이는 선조의 새 장가였습니다. 선조는 전쟁 이후 의인왕후가 죽자 새 중전을 맞이했는데 이 때 선조의 나이 51세, 새 중전..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77)> 광해 1 - 광해의 恨(1)

광해 1 - 광해의 恨(1)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첫째는 임해군) 공빈은 아들 둘이 서너 살일 때 세상을 떴고, 왕실에는 달리 적자가 없었습니다. 광해는 비록 서자이나 형인 임해군과 달리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도량이 넓어 일찍이 왕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왜란이 발발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는 부랴부랴 광해를 세자로 삼고, 곧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 나는 의주로 가 명에 원병을 청할 것이니, 세자는 남아 군무를 담당하라. 광해는 분조(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작은 조정, 선조는 지는 신의주로 토끼면서도 원조라고 칭함. 병신 육갑을.떨어요)를 이끌고 사실상 적지나 다름없는 요소요소를 풍찬노숙하며 내달았습니다. 세자인 광해가 솔선하여 항전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76)> 선조 24 - 별이 지다!

선조 24 - 별이 지다! 정유년 2차 침략 시 히데요시의 목표는 조선 땅의 절반인 4도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히데요시는 이를 위해 조선인의 무자비한 살상을 공식적으로 지시하였습니다. 무자비한 살상으로 조선 국왕의 항복을 받고자 한 것입니다. 이에 일본군은 한강 이남까지 갔다가 다시 남하하면서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였고, 그 징표로 일본에 보낸 조선인의 코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다는 소식과 명나라의 2차 파병 소식이 전해져 왔고, 여기에 예상치도 않게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기에 이르자, 일본군은 철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명나라 군대도 이번에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제대로 박살내자는 의지를 불살랐으나(사기극 주범 심유경의 죽음도 고려한 것임), 울산..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75)> 선조 23 - 명량해전(2)

선조 23 - 명량해전(2) 이순신의 판옥선은 한 척이 더해져 13척, 백성들의 어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후미에 배치하였습니다. 왜군 함대는 물살이 순방향인 때를 선택해 급격한 조류를 타고 울둘목을 일거에 통과해 벽파진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설령 울둘목을 조선군이 막아선다 해도 빠른 조류를 타고 대규모 선단이 진격한다면 몇 척 안 되는 조선 수군이 견딜 수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함선이 많아도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있는 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선 함대의 규모에 겁을 먹고 뒤로 빠지려는 휘하 장수들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초요기(招搖旗 -..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74)> 선조 22 - 명량해전(1)

선조 22 - 명량해전(1) 백의종군의 길을 가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노모를 걱정하는 마음을 난중일기에 가득 채울 만큼 효자인 이순신. 그는 1597년 4월 19일자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일찍 집을 나서야겠기에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 울며 하직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곧 그동안 애써 키운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수군이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며칠 뒤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3도수군 통제사로 복귀하라는 교서를 받고 곧바로 남해안으로 떠났습니다. 에휴~ 우리 이순신 장군님은 사람도 좋지~내같으면 마~확~그냥~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임명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합니다. - 출병을 독촉해 이런 일을 했으니, 이는 사람이 아니고..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73)> 선조 21 - 이순신 제거되다!

선조 21 - 이순신 제거되다! 이순신이 일본군의 흉계를 간파하고 가덕도 출전을 거부하던 그 때에 맞추어 원균의 장계가 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 신의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수군으로 질러나가 큰 바다에서 위력을 보이면 해전에서 이기지 못해 겁을 먹고 있는 가토는 필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출정 불가론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고 이순신을 제거하는 쪽의 의견을 수차례 밝혔고, 조정은 선조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이제는 이순신이 가토의 목을 베어 온다 해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선조) - 이순신은 성품이 강하고 뜻을 굽힐 줄 모르는데,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해지기 마련이옵니다.(유성룡) - 위급할 때 ..

조선왕조실록 202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