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72)> 선조 20 - 이순신을 제거하라!

선조 20 - 이순신을 제거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 사기극을 벌인 고니시의 목을 베지 않는 대신, 고니시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 지난 원정의 실패는 바닷길과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데 있다.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 호남을 장악하라. 그리고 조선 백성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신속히 남해안의 성으로 복귀하라.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조선 왕이 강화를 애걸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강화가 되어가던 차에 일본이 다시 침략을 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또 다시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조선 수군의 격퇴, 호남 점령이라는 양대 과제를 명 받은 일본군 장수들에게 이순신의 제거는 최우선의 공통 과제였습니다. 히데요시로부터 마지막 기회를 부여 받은 고니..

조선왕조실록 2021.04.20

<조선왕조실록(69)> 선조 17 - 진주성 대학살

선조 17 - 진주성 대학살 벽제관 패배 이후 명나라 측은 싸움 보다는 강화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행주싸움 패배로 전황이 여의치 않다고 여긴 히데요시는 이즈음 “순차적으로 퇴각하되 명과 유리한 협상을 이루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안전한 퇴각을 위해 명나라와 담판을 시도해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만나 명나라가 두 명의 강화사를 일본군에 보내기로 했고, 일본군은 심유경과 강화사, 임해군과 순화군을 앞세우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그 퇴각 행렬은 여유가 넘치는 나들이 같은 행군이었습니다. 권율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고자 했으나 명나라측은 이를 제지했고,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추격하는 시늉만 하였으며, 일본군은 결국 안전하게 남해안..

조선왕조실록 2021.04.15

<조선왕조실록(68)> 선조 16 - 행주대첩

선조 16 - 행주대첩 드디어 파병 결정을 한 명나라. 파병결정 후 처음 조선으로 들어 온 명나라 장수 조승훈은 왜군을 얕잡아 보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명나라군 4천 5백, 조선군 3천을 잃는 대패를 하였습니다. 그 후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온 이여송은 조선으로부터 작전권을 인수한 후 조명 연합군을 이끌고 곧바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사실, 전쟁 시작과 함께 패배를 모르며 북진을 계속 해 온 고니시의 제1군은 이즈음 이순신으로 인해 서해 바다를 통한 증원군과 군수품 지원이 막힌 데다 조선군과 의병의 반격으로 고립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에 조명 연합군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기세에 밀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평양성 점령 6개월 만에 왜군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한양으로 퇴각하..

조선왕조실록 2021.04.15

<조선왕조실록(67)> 선조 15 - 반전의 토대

선조 15 - 반전의 토대 전회에서 의병의 활약과 희생에 대해 살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왜란 통에 모든 백성이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서 싸운 것은 아닙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왕자들을 곳곳에 파견해 백성들을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램)하고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함경도로 떠난 임해군과 순화군을 그곳 백성들 중 일부가 붙잡아 왜군에게 넘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그곳에서도 백성을 수탈하기에 바빴는데다, 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 이후 이곳 백성들에 대한 차별이 커 원성이 컸고, 게다가 임금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이 지역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요 한편,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언제든지 요동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명은 선조의 요동행 타진..

조선왕조실록 2021.04.15

<조선왕조실록(66)> 선조 14- 열혈남아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의무는 적고(병역? 그런 거 난 몰라), 권리는 무한 (벼슬하여 백성 위에 군림하고, 땅 늘리고~)했습니다. 그 많은 것을 누리던 사대부들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는 대거 도망했고,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이들도 대부분 왜적의 모습만 보고는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대부의 명예를 지킨 이들이 있었으니, 이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격렬하게 싸운 의병장 입니다.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고 열흘이 지난 뒤 경상도 의령에서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한 열혈남아입니다. 의령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왜적 보급로 상의 중요 지점이었는데, 곽재우는 게릴라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곽재우는 적의 보급 수송선단이 지나가는 강바닥에 말뚝을..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65)> 선조 13- 이순신, 바다를 장악하다!

선조 13 - 이순신, 바다를 장악하다! 이순신이 2차 출동에 나선 5월 29일, 이 때에는 전라 우수영 이억기 부대, 원균 부대와 합류해 판옥선만 50척이 넘는데다 거북선이 앞을 이끌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사천포에서 왜선 12척을 모두 격파하고, 이튿날 당포에서 20척의 왜선을 깨트렸습니다. 거북선을 선봉에 세운 조선 수군은 이어 당항포에서 26척, 율포에서 3척을 격파한 뒤 각 군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원균은 싸움보다는 왜군의 수급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합니다.(저기도 있다~ 건져 올려~~) 원균은 그렇게 확보한 수급과 함께 장계를 올려 선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한편, 거듭된 수군의 참패에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00명으로 5만의 조선 관군을 깨트린 용인전투의 주인..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64)> 선조 12- 비장의 전함 거북선(龜船)

선조 12 - 비장의 전함 거북선(龜船)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치하한 뒤 곧바로 전함을 수리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는 등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습니다. 조선 수군과 백성들은 그동안 "이런다고 과연 우리가 왜군을 이길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옥포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을 믿고 따른다면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5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2차 출동에 나섰는데, 이 때는 비장의 전함 거북선이 함께 했습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63)> 선조 11 - 승전의 시작

선조 11 - 승전의 시작 왜군 침입이 이순신에게 알려진 것은 왜군 부산상륙 이틀 후인 4월 15일이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함대를 처음 대면하고는 그 규모와 위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친 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정에 전라좌수군과 합세하여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원균의 구원 요청에 이순신은 "각자 맡은 지역과 소임이 있으니. 함부로 쉽게 군사를 이동시킬 수 없다"며, 지원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이은 선조의 명령서의 내용은 "원균이 여러 포구에서 싸울 준비를 마쳤다고 하므로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힘을 합쳐 맞선다면 능히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출정을 위해 경상우수군의 상황을 파악해보니 군사도 배..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62)> 선조 10 - 위대한 성웅 이순신!!!

선조 10 - 위대한 성웅 이순신!!! 100년에 걸친 실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최정예 군대,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 거기에 죽거나 이기거나만을 외치는 사무라이 정신, 이러한 전력을 소유한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벌을 꿈꾸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히데요시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1.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일단 조선 전역을 장악한다. 2 .진격한 군대가 고립되지 않게 안전하게 군수물자와 응원군을 보내준다. 3. 어떻게? 서해를 통해 곧장 한양으로, 평양으로, 이른바 수륙병진전략을 사용한다. 4. 이리되면 조선은 항복할 것이고, 그런 다음 조선군을 보조군대, 즉 총알받이로 삼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군수기지로 하여 명을 친다. 이와 같은 전략은 조선 수군을 아예 유령 취급하는 것을 전제로..

조선왕조실록 202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