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61)> 선조 9 - 북으로 북으로

선조 9 - 북으로 북으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쳐 온 후, 한양 방어를 도원수 김명원, 유도대장 이양원에 맡기고 부원수 신각에게 한강 방어를 맡겼습니다. 한강 북단에 진을 친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남단의 일본군이 헤엄쳐 강을 건너는 자세를 잡자, 겁을 집어 먹고 병사들에게 무기를 버리게 하고는 자신은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임진강 방면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런겁쟁이, 비겁자를 도원수에 앉히다니 선조가 망조야 부원수 신각은 양주 방면으로 후퇴한 후 왜군이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약탈을 다닌다는 정보를 듣고 해유령에 매복했다가, 약탈하고 돌아가는 왜군 수십 명을 발견하고 이들의 목을 베었는데, 이것이 작지만 개전 이래 조선 육군의 최초 승리입니다. 신각은 조정에 70 수급과 승전보를 보냈는데, ..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60> 선조 8- 선조임금, 파천하다!

선조 8 - 선조임금, 파천하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 신립의 패전소식을 들은 조정은 공포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들은 속으로, 남은 한 가지 길은 파천, 즉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먼저 파천을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선조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라면 파천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대부분의 대신들은 파천을 반대했고, 이산해와 유성룡이 파천의 부득이성에 동의하였으며, 신하들은 이산해를 파직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파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미 식솔을 피신시켰는가 하면, 스스로 물러나 도망갈 궁리를 하면서도, 파천의 책임을 지지 않고자 마음에도 없는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59> 선조 7 - 연전연패

선조 7 - 연전연패 부산이 함락되기까지 입은 왜군 피해는 전사 100여 명, 부상 400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이 정도의 항전도 그나마 거기까지였습니다. 경상 좌병사와 경상 좌수사는 왜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성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고, 경상 우수사 원균은 배를 바다 속에 밀어 넣고 도망을 쳤습니다. 왜군은 실제적 전투경험에다 조총으로 무장까지 했고, 정보전에 전술전략까지 완벽했으니, 오합지졸 조선군이 이들을 이길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산에 속속 상륙한 5만의 왜군 선봉대는 세 갈레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을 계속했습니다. 한편, 일본의 침략소식은 나흘 뒤인 4월 17일 조정에 전해졌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선조는 유성룡, 신립, 이일 등을 주요 자리에 임명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토록 하였..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58)> 선조 6- 침략, 그리고 조선판 킬링필드

선조 6 - 침략, 그리고 조선판 킬링필드 선조 25년인 1592년 1월 히데요시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수십만 대군이 나고야로 집결했습니다. 이 소식은 사신을 통해 조선에 전해졌지만, 조정은 이 소식을 무시했습니다. 그해 4. 13. 조선은 고니시 유끼나가가 이끄는 18,700명의 왜군 선봉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고서야 침략 사실을 알았으나, 상륙 저지를 위한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최정예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앞에서 조선은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1선봉대 고니시 유키나가, 제2선봉대 가토 기요마사군이 속속 부산포로 상륙했고, 부산진과 동래진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조선군이 왜군과 처음 대적한곳은 부산 진성, 첨사 정발 이하 군민은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57> 선조 5 - 예고된 침략(2)

선조 5 - 예고된 침략(2) 조선 통신사의 일본 내 활동과 귀국 후의 활동에 대해 실록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유성룡의 ‘징비록’을 근거로 한 ‘수정실록’에는 김성일이 당당하게 일본의 무례를 꾸짖은 반면, 황윤길은 재물확보에 급급해 비루한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김성일이 유성룡과 같은 동인인데다, 전쟁발발에 대해 헛다리를 짚는 걸 보면, 유성룡의 김성일에 대한 후한 평가는 자기 붕당에 대한 자화자찬에 불과한 것으로 봄이 타당합니다. 김성일은 유학자로서의 자부심이 워낙 세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 정세파악을 그르치고 조정에 사실상 허위보고를 하고 마는 크나큰 우를 범합니다. 조선에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히데요시의 눈빛이 빛나고 지략이 풍부해보였으며, 여러 사정..

조선왕조실록 2021.04.13

<조선왕조실록(56)> 선조 4 - 예고된 침략(1)

선조 4 - 예고된 침략(1) 정여립 사건으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고, 붕당 정쟁으로 나라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던 1590년경, 명나라에서는 13대 황제 신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세가 약화되고 있었던 반면, 북방에서는 만주족 누루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여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전국시대가 오다 노부가나와 그를 계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해 통일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100년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는 극도의 자신감에 더해, 끝없는 전쟁을 통한 최정예의 수십만 군대를 보유하였으니, 이러한 자신감과 군대를 활용하고픈 욕구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언제든지 반기를 들 여지가 있는 영주들이 딴 생각을 못하도..

조선왕조실록 2021.04.08

<조선왕조실록(55)> 선조 3- 사화, 붕당, 그리고 조선의 위기

선조 3 - 사화, 붕당, 그리고 조선의 위기 조선시대 정치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는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세조의 계유정난 이래 기득권을 가진 기존 관료 집단인 훈구파가 조정을 좌우하고 있었는데,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를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고,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발생하여, 사림의 무수한 선비들이 옥사하였음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 후 선조 대에 이르러 윤원형 같은 외척세력이 쇠퇴하자, 사림이 다시 정계로 대거 진출하였는데, 사림 사이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무리끼리 뭉쳐 상대방과 반목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붕당입니다. 선조 대에 김효원과 심의겸의 이조정랑 추천 문제로 생긴 양자의 반목으로 관료..

조선왕조실록 2021.04.08

<조선왕조실록(54)> 선조 2 - 율곡 이이

선조 2 - 율곡 이이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말보다 글을 먼저 익혔고 세 살에 시를 지었으며 일곱 살에 경서를 섭렵하기 시작했고 열세 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누구는 열세살에 담배를 배웠는데) 효자인 이이는 어머니이자 스승인 사임당 신씨가 죽자 인생에 회의를 느껴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불교를 공부했고, 하산해 성리학에 전념하여 20대에 이미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이이는 명종 19년에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선 뒤, 선조 1년에 이르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이의 학문적 명성과 됨됨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실상 이이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2021.04.08

<조선왕조실록(53)> 선조 1 - 동서분당(東西分黨)

선조 1 - 동서분당(東西分黨) 명종이 34세의 나이에 죽자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3남이 13세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선조입니다. 서자도 아닌 서손이 임금이 된 유일한 사례입니다. 선조가 어린 관계로 대비인 인순황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달랑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었고, 선조는 매우 어린 나이에 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조 시대에는 초기부터 사림(士林)이 크게 세를 이루어 조정에 등장하였습니다.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 이이 등이 그들로서,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선조에게 여러 가지 상소를 하는 등 조정을 좌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현재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백성의 실제적 삶과 별 상관도 없고 구체적 대책도 없는 실로 쓸데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할..

조선왕조실록 2021.04.08

<조선왕조실록(52)> 명종 2- 명종의 죽음과 사림의 재등장

명종 2 - 명종의 죽음과 사림의 재등장 문정은 명종 8년, 명종 나이 스물에 섭정을 그만두고 명종으로 하여금 만기를 친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이었고, 그 동생 윤원형의 권세 역시 변함없이 강성하였습니다. 윤원형은 20년동안 권력 실세로 군림하면서 그 끝을 모를 부패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사시사철 전국 각지에서 뇌물을 실은 수레가 올라왔고, 곳곳이 농장이며, 한양에만 대저택이 10여 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윤원형의 주변 인물 중 최고 화제는 바로 정난정이었습니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과 관비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로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를 유혹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로, 원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 첩이 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

조선왕조실록 2021.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