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41)> 연산군일기 7- 패악의 절정 그리고 몰락의 시작

연산군일기 7 - 패악의 절정 그리고 몰락의 시작 갑자사화가 시작된지 70일이 지난 후 연산은 이만하면 백성과 신하들이 정신을 차렸을 것이라는 매우 조심스런 대신들의 간언에, “10년은 풍속을 바로잡아야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대신들을 아연실색하게 하였습니다. 연산의 자칭 개혁은 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졌고 잔혹해졌습니다. 연산은 죄인을 잡아올 때 손바닥을 꿰어 끌고 오게도 하고, 배를 가르고 뼈를 바르는 광인과도 같은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또한 연산은 어미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고, 조참에 백관을 꿇어앉도록 하고, 하급 문신과 대간들을 자신의 가마를 메게 하는 등 하는 짓이 점점 해괴해졌습니다. 조선의 태종이나 세조 그리고 중국의 예에서 보면..

조선왕조실록 2021.04.01

<조선왕조실록(38)> 연산군일기 4- 무오사화(戊午士禍)(2) 그리고 불길한 전조

연산군일기 4 - 무오사화(戊午士禍)(2) 그리고 불길한 전조 “조(弔)의제문”은 중국의 “항우”가 왕인 “의제”를 때려죽인 것을 비난하는 한편 불쌍한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으로서,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이 쓰고, 그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실은 것입니다. 그러나 “조(弔)의제문”의 진짜 의미는 따로 있었으니, 이는 세조를 항우에, 단종을 의제에 빗대어, 결국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난하고 억울하게 죽은 단종을 조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연산은 이들이 세조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역심을 품은 것으로 간주하고, 거대한 옥사를 일으켜,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한편, 조의제문을 사초에 적은 김일손 등을 능지처사 하였습니다. 또한 김일손을 격려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목을 베었고,..

조선왕조실록 2021.03.30

<조선왕조실록(37)> 연산군일기 3- 무오사화(戊午士禍)(1)

연산군일기 3 - 무오사화(戊午士禍)(1) 사초를 살피다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과 거기에 세조가 며느리 격인 여자를 탐했다는 내용의 사초를 본 이극돈은 사지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극돈이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사초의 내용은 본래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었다가 나중에 연산이 알게 되면 실록청의 당상인 자신이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기에, 이극돈의 고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민하던 이극돈은 평소 아이디어가 풍부한 유자광을 찾아갔습니다. 유자광은 학문만 높은 것이 아니라 당구, 골프, 바둑, 고스톱 등 다방면에 큰 재주를 가졌으나 서자 출신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에 사회불만이 많은 자였는데, 세조 시절에 과감한 행보로 세조의 파격적 총애를 받다..

조선왕조실록 2021.03.30

<조선왕조실록(36)> 연산군일기 2- 사화(士禍), 그리고 무오사화의 시작

연산군일기 2 - 사화(士禍), 그리고 무오사화의 시작 사화(士禍)는 조선시대에 조정 중신과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화(禍)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 개국 이래 세종 성종 등 임금이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유학을 장려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선비들 사회, 즉 유림(儒林)은 활기에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성종 때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 주의, 사상, 향토관계 등으로 파벌이 생겼는데, 이를 크게 대별하면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입니다. 훈구파는 세조의 정난을 도와 높은 지위와 많은 땅을 소유한 일파로서 정인지, 신숙주, 이극돈 등이 그 일파입니다. 그리고 사림파는 경상도 출신의 대학자 김종직을 필두로, 그 제자인 정여창, 김일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로서, 사림파..

조선왕조실록 2021.03.29

<조선왕조실록(35)> 연산군일기 1- 연산의 초반 모습

연산군일기 1 - 연산의 초반 모습 세자시절의 연산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아버지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으며, 그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 등 잔병치레가 잦은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왕자같지 않고 삐리리한 모습에 별로 신경이 안쓰임) 연산은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미인 폐비 윤씨의 일을 알게 되었다고 에 기록되어 있으나, 세자 시절에 이미 어미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연산이 이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조정의 경계심 자극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 있으므로, 일부러 모른 척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지혜로운 왕자였는데~/) 연산의 아..

조선왕조실록 2021.03.29

<조선왕조실록(34)> 예종 성종 4- 폐비윤씨 그리고 불행의 전조!

예종 성종 4 - 폐비윤씨 그리고 불행의 전조! 성종 4년, 가난한 집 선비 윤기무(또는 윤기견)의 딸이 성종보다 12살 많은 나이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습니다. 윤씨는 후궁 시절 대왕대비와 왕대비 등 대궐의 어른들을 잘 봉양하여 이들의 총애를 받았고, 중전 한씨(한명회의 딸)가 죽자 임신타법을 사용해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윤씨는 중전의 자리에 오른 지 4개월 만에 아들까지 출산하니 이 아들이 바로 연산군입니다. 가난한 집 선비의 딸로 태어나 인생 역전의 대박을 터트린 중전 윤씨, 그 녀의 인생이 장밋빛으로 빛날 것 같았으나, 그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실록에는 중전 윤씨의 죄가 세세히 열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조선왕조실록 2021.03.29

<조선왕조실록(33)> 예종 성종 3- 예종의 죽음, 성종의 등극

예종 성종 3 - 예종의 죽음, 성종의 등극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써 세자가 되었고, 5년여의 세자 생활을 거친 후 등극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한명회 등 공신들이 정사를 농단하는 공신의 시대였는데, 온건한 성품의 예종은 등극하자 의외로 강하게 공신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예종은 즉위 후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공신을 불문하고 칼을 씌워 잡아와라”, “탐오 불법이 있다면 공신, 당상관을 가리지 말고 구금하고,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라”는 명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장악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아울러 몇 년 안에 기어코 부왕인 세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예종은 실제..

조선왕조실록 2021.03.29

<조선왕조실록(32)>예종 성종 2-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2)

예종 성종 2 -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2) 한명회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1녀를 당시 한명회와 더불어 세조의 최고 측근인 신숙주의 장남에게 시집을 보냈습니다. 최고의 정난공신이 사돈으로 뭉친 것이지요 한명회는 이어서 3녀를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에게 시집보냈습니다. 그리고 해양대군은 형인 의경세자가 세자가 된 지 2년 만에 죽자, 의경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세자가 되는데, 이는 해양대군의 장인이 한명회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남편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인해 중전이 되어 보지 못한 채 대궐에서 밀려 난 의경세자의 부인(나중에 인수대비)은 세자가 된 시동생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간파하고, 시동생인 해양대군이 죽게 되면 그 후임으로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울 요량으로(아..

조선왕조실록 2021.03.27

<조선왕조실록(31)>예종 성종 1-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1)

예종 성종 1 - 세조의 죽음, 예종의 등극(1) 세조는 완전한 권력을 거머쥐게 될 때까지 안평대군 등 가까운 혈육과 김종서, 성삼문 등 시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인물들을 참 많이도 죽였고, 그 살육의 행진은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서야 마무리되었습니다. 세조의 이러한 무력질주에 대부분의 계책을 낸 사람은 한명회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난을 통해 무력으로 왕이 된 절대군주가 원활한 통치와 후대의 안정적 왕권 확보를 위해 취하는 기본 방정식은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공신들을 모조리 죽여 후환을 없애는 방식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세조는 한명회 등 공신들을 끝까지 예우하며 함께 정국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한명회와 신숙주 등 공신이 계유정난의 성공에 절대적..

조선왕조실록 2021.03.27

<조선왕조실록(30)> 단종 세조 8- 한 마리 원통한 새

단종 세조 8 - 한 마리 원통한 새 단종은 그 유명한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곧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영월 객사로 나와 살다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왔으나 차마 전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자, 단종은 스스로 목을 메고는 줄을 창 밖으로 빼내 당기게 하여 자살을 하였답니다. 이 외에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많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단종의 죽음 경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만큼 단종이 어이 없게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 때 단종의 나이 열일곱, 즉위한 지 5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임금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으나, 권력 추구의 희생양이 되어 얼마 되지도 않는 생을 두려움..

조선왕조실록 2021.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