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89

<조선왕조실록(51)> 명종 1- 문정왕후 그리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명종 1 - 문정왕후 그리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문정왕후(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조정의 실권은 윤임을 필두로 한 대윤에서 문정의 동생인 윤원로, 윤원형을 필두로 하는 소윤으로 넘어갔습니다. 아재비와 조카싸움에서 조카 승~ 문정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소윤 측 윤원형은 그 측근인 임백령 등을 동원하여 대윤 측의 대표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였다고 무고함으로써, 윤임·유관·유인숙 등 무수한 신료와 선비들을 사사하니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입니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윤씨 외척간의 싸움이었으나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으로서,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 이후 약 50년간 신료와 선비들이 대규모로 옥사한 사화는 이로써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백성의 평안은 뒷전으로 미룬채 50년..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50)> 인종 명종- 인종독살설 그리고 명종 즉위

인종 명종 - 인종독살설 그리고 명종 즉위 조선 12대 왕 인종은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습니다. 계모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고, 아들 나이인 이복동생 경원대군을 언제나 우애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인종의 어진 성품을 이용하여 인종에게 강짜를 놓기 일쑤였고(주상, 우리 집안은 살려주시는 겁니까. 뭐 죽여도 도리는 없지만~ 늙은 여우는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인종은 문정왕후를 더욱 지극히 대우하였습니다. 이는 인종을 방패막이로 하여 대윤 측으로부터 소윤 측의 세력을 지키겠다는 문정의 고도의 술수였습니다. 인종은 재위 8개월 만에 죽는데, 이는 조선 왕 중 가장 재위기간이 짧은 것입니다. 참고로 영조가 52년 선조가 41년인데, 백성을 위해 한 일도 없이 참 오래도 해 처먹었습..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9)> 인종- 인종 즉위와 끝없는 권력투쟁

인종 - 인종 즉위와 끝없는 권력투쟁 중종의 뒤를 이은 조선 제12대 왕은 인종입니다. 인종은 중종의 정비인 장경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듬해 장경왕후가 죽어 궐 밖에 재상가에서 성장하였는데, 그 총명함에 신료들이 모두 탄복할 지경이었습니다. 인종은 관례보다 빠른 6세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 되었고 커가면서 이상적인 군주 상에 가까워진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세자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즉,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빈 박씨(도지원)의 소생인 복성군이 있었고, 새로 중전이 된 문정왕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종은 자기의 왕위 보존에만 관심이 있을 뿐 대승적 견지에서의 국가관이라고는 애초에 없었으니, 인종은 말만 세자일 뿐 그 앞날은 불안하기 그지..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8)> 중종 7 - 중종의 죽음

중종 7 - 중종의 죽음 남곤이 죽고 며칠 후인 세자의 생일날 해괴한 일이 궁궐에서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꼬리가 반쯤 잘리고 사지가 불로 지져진 쥐가 동궁 숙소 근방에서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자(13세)는 쥐띠였습니다. 이 사건을 “작서의 변(灼鼠의 變)”이라 합니다. 조정에서는 이 일이 누군가 세자를 저주하여 벌인 일로 보고 조사를 시작하였는데, 대왕대비가 당시 세도를 부리던 경빈 박씨(박원종의 수양 딸)를 범인으로 지목함으로써 별다른 증거도 없이 경빈 박씨는 그 아들인 복성군과 함께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음모와 모함의 달인인 문정왕후와 김안로가 있었는데, 이 중 누군가 벌인 일을 비교적 순진한 경빈 박씨가 뒤집어 쓴 것입니다. 한편, 귀양 가 있던 김안로는 남곤의 죽음..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7)> 중종 6 - 조광조의 죽음

중종 6 - 조광조의 죽음 조광조는 임금과 대면할 기회 한 번 갖지 못한 채 그대로 유배 길에 올랐습니다. 조광조는 오로지 근본에 힘쓰고 원칙과 정도만 걸어온 사람으로서, 반듯하고 사심이 없었으며 온화한 성품에 인재라면 천민이라도 등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누구라도 공부하고 수양하면 성인군자가 될 수 있었다고 믿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임금을 끝없이 계도하여 군자가 이끄는 나라를 만들고자 성심을 다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조광조는 현실정치의 냉엄함을 잘 알지 못한 치명적 실수, 군왕제 하에서 신하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중종의 개인적 자질 부족 등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지도자는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데, 쪼다 중종이 복을 찼네)여러 이유로 그 꿈을 접은 채 정치 개혁의 길에 들어선지..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6)> 중종 5- 기묘사화(己卯士禍)(2)

중종 5 - 기묘사화(己卯士禍)(2) 홍경주는 어느 날 밤 중종을 찾아가 조광조의 권세와 인기가 이미 임금을 능가하였고, 이에 공신들이 크게 걱정을 하고 있으며, 시중에는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을 하는 등 가뜩이나 불안해하는 중종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야사에는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시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벌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쓰게 한 후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임금에게 들고 가 아뢰었다고 하나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인데다 이야기 자체가 선조 이후에 등장하는 것임에 비추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홍경주가 중종에게 주초위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의 참언을 입에 올려 중종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댄 것은 사실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하튼, 조..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5)> 중종 4- 기묘사화(己卯士禍)(1)

중종 4 - 기묘사화(己卯士禍)(1) 조광조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주장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반정 자체를 역적질로 본다는 심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광조 세력은 과도한 공신 지정에 따른 폐해 수정이라는 명분과 중종의 지지를 믿고 이를 과감히 추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중종은 조광조 세력의 위와 같은 대규모 위훈삭제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대했으나, 조광조 세력은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중종은 결국 본인의 의지와 달리,다른 신료들의 지지까지 입은 조광조의 주장을 본심에 반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4)> 중종 3- 조광조의 개혁

중종 3 - 조광조의 개혁 중종은 조광조의 학식과 됨됨이에 반해 조광조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게 되었고, 급기야 과거 급제 2년도 되지 않아 조광조를 홍문관의 수장인 부제학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울러 조광조가 몰고 온 바람은 조정 안팎의 젊은 선비들을 매료시켜 이들 역시 조광조를 진심으로 따르는 지경이 되었고, 대신들도 가급적 조광조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광조는 중종과 선비들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몽주의 신원을 회복하여 문묘에 종사하도록 함으로써 조광조가 사림의 정통 학맥을 잇는 선비임을 대외적으로 공인받았습니다. 이어서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가 시나 문장, 즉 사장(詞章)에 능한 사람을 뽑을 뿐 성리학의 본질에 부합하고 덕이 있는 자를 뽑지 못한다는 등의 이유로 현량과의 실시를 강력 주장하였고,..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3)> 중종 2- 중종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조광조의 등장

중종 2 - 중종이 살아가는 법 그리고 조광조의 등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성대군은 변덕스러운 연산 형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이 극도로 조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법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진성대군은 왕이 되었으나 힘이 없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중종은 서슬 퍼런 반정 중신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런 까닭에 중종의 살아가는 법은 바로 “연산과 반대로 하기”였습니다. 사냥이나 연회를 피하고 학문에 열중했으며 신하들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습니다. 중종의 모든 결정은 항상 “조정이 모두 마지 않으니 따르노라”식이었고, 왕의 주도 아래 전망을 갖고 추진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이 시기의 백성들은 연산 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달프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개..

조선왕조실록 2021.04.06

<조선왕조실록(42)> 중종 1- 연산의 죽음, 중종 등극

중종 1 - 연산의 죽음, 중종 등극 박원종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인 박씨의 동생으로서, 성희안, 신윤무 등과 반정을 논의한 후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하나씩 물었는데, 조정 대신들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반정계획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올 것이 온 것으로 판단한 것이지요 비교적 연산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던 박원종이 왜 반정을 시도했는지, 우국충정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야사에는 연산이 박원종의 누이인 월산군 부인을 겁탈했다고 하나, 월산군 부인의 나이를 보나 그즈음 의 내용을 보나, 이런 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박원종은 신수근, 임사홍 등 극소수의 연산 측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하들의 호응을 얻어 경복궁에 무혈입성하였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

조선왕조실록 2021.04.01